日 왕궁 폭파…최초 여성 비행사 권기옥, 독립 향한 날갯짓
조선의 독립을 위해 하늘을 날았던 독립운동가, 대한민국 공군의 어머니
임진미 편집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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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5/11/25 [08:04]  최종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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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운동가, 한국 최초의 여성 비행사 권기옥. 사진=국가보훈처     © 임진미 편집기자


[홍익/역사/통일=플러스코리아타임즈 임진미 편집기자] 16세 소녀 권기옥의 꿈은 조국의 독립과 하늘을 나는 비행사였다. 그녀가 하늘을 날고 싶었던 단 하나의 이유는 ‘독립’. 권기옥은 어린나이에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1919년 3·1운동 당시 평양 숭의여학교를 다니던 19세 소녀 권기옥은 적극적으로 만세운동에 가담한 죄로 체포돼 6개월간 구금당한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출옥 후에도 임시정부의 연락원으로 활동하던 권기옥은 경찰의 주요 감시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후 상해에 도착한 권기옥은 항공학교의 문을 두드린다. 1924년 운남성 곤명에 있는 운남비행학교 입교에 성공한다. 당시 운남성은 군벌인 당계요가 지배하고 있었는데 임시정부의 요인이었던 이시영이 당계요에게 직접 추천창을 써준 덕분에 운남비행학교장의 강력한 반대를 극복하고 입교를 허락받은 것이다.

 

운남비행학교는 중국 서남단 외진 곳에 위치해있기 때문에 권기옥은 상해에서 베트남으로 돌아 먼 길을 가야만 했다. 여기에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당시 중국에는 북경 근교에 남원항공학교, 보정항공학교가 있었고 광주에 광동비행학교, 곤명에 운남비행학교가 있었다. 1922년 당시 광동비행학교와 보정비행학교에는 비행기가 없었기 때문에 권기옥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국립이었던 남원항공학교는 여성이었던 권기옥을 받아주지 않았다. 항공독립운동사 연구가이자 소설가인 이윤식 씨는 “남원항공학교를 가지 않은 이유를 권기옥이 언급한 부분이 없어 확실한 이유는 알 수 없다”고 설명했다.

 

당시 운남비행학교에는 20여 대의 비행기가 있었다. 연습기는 프랑스제 80마력인 코드롱 복엽기와 150마력짜리 브리케이트 단발기, 이탈리아제 언살도가 있었다. 권기옥은 이 비행기들을 타고 2년이 넘는 시간동안 운남비행학교에서 비행술을 훈련받았고 1925년 2월 28일 졸업했다. 운남비행학교에서 그녀의 총 비행시간은 1,500시간 정도라고 알려져 있다.

 

한편 권기옥은 이곳에서 목숨의 위협을 받기도 했다. 그녀를 집요하게 추적하고 있던 일본 경찰이 살인청부업자를 보낸 것. 다행히 조선인 동료들의 도움으로 외려 살인청부업자를 권총으로 사살해 위기를 넘긴 권기옥은 졸업 후 다시 상해로 돌아왔다. 권기옥 암살 시도 사례를 통해 일본이 항일투쟁을 벌이는 한인들에 대해 얼마나 치밀하고 집요한 감시를 벌였는지 알 수 있다. 

 

1927년 봄에는 국민군의 항공대가 발족하자 항공대 소령으로 임관해 창설 멤버로 활약하기도 했다. 1927년 3월에는 총사령 장중정 장군의 동로군 항공사령부 조종사가 된다. 1979년 8월 29일자 <서울경제신문> 인터뷰에서 권기옥은 “중일전쟁(1931-1932, 상해사변으로 추정) 때 상해 상공에서 폭격비행도 했지만 나의 소망이었던 조선총독부 폭격은 끝내 못해본 것이 한이라오”라는 말을 남겼다.

 

▲ 1935년 중공 선전비행을 준비하던 무렵의 권기옥(왼쪽에서 두 번째. 가운데 이탈리아인 교관, 오른쪽 세 번째 인물은 중국 최초의 여자 비행사 이월화). 사진=정혜주, 공군 웹진 ‘공감’     © 임진미 편집기자

 

광복 후 1948년 귀국한 권기옥은 국회 국방위원회 전문위원으로 활동하며 대한민국 공군 창설에 기여했다. 이 때문에 ‘공군의 어머니’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꿈을 키우고 하늘을 날았던 권기옥은 여성이라는 점에서 높게 평가할 수 있다. 일제 강점기는 보수적이고 여성차별이 심했던 시절이다. 해방 전 여성 비행사는 권기옥, 박경원 이정희, 김복남이 전부로 손에 꼽을 정도였다. 더욱이 남자 비행사들도 수가 그리 많지 않았다는 점에서 권기옥은 높게 평가할만하다. 소설가 이윤식 씨는 권기옥에 대해 “남자들도 비행사가 되기 힘든 시절, 또한 위험한 일이라고 기피하던 고정관념을 깨고 조종사가 된 것은 높이 평가할 일”이라고 전했다.

 
영화 <청연>의 주인공 박경원을 둘러싸고 알려지게된 친일과 최초가 과연 누구인가?

 

그 시비 과정에서 박경원과 대비해 거론되는 인물이 권기옥이었다. 박경원과 같은 시대 독립을 위해 하늘을 날며 날개의 꿈을 꿨지만, 박경원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그 꿈을 키워갔던 또 한명의 여자 비행사 권기옥.

 

2005년 12월 29일 개봉한 한국 최초의 여성 비행사를 그린 영화 <청연>으로 불거진 주인공 박경원의 친일 행각 문제가 불거졌다.  한국인 최초의 여성 비행사로 알려진 박경원은 영화를 만들기 전부터 친일 인사라는 논란에 휩싸였던 인물로 ‘최초’ 여부에 대해서도 의혹을 사고 있었다. 박경원보다 먼저 비행기를 탔던 독립운동가 권기옥이 사실상 최초의 여성 비행사였기 때문이다. 배급사는 논란을 진화하기 위해 당초 ‘최초의 여성 비행사’로 홍보했던 광고 문구를 ‘최초의 민간 여성 비행사’로 고치기도 했다.

 

이후에도 박경원에 대한 논란은 반론에 반론을 거듭하며 뜨거운 이슈로 떠올랐다. 결국 총 제작비 120억 원을 들여 만든 <청연>은 2주간 50만 관객을 동원하는데 그치며 흥행에 참패하고 말았다. 박경원이 친일이냐, 아니냐의 논란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소설가 정혜주씨가 2006년 <오마이뉴스>에 기고한 박경원 관련 기사에 따르면 그녀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일본 총리의 할아버지 고이즈미 마차지로와 내연 관계에 있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박경원이 자신의 비행기 ‘청연(푸른제비)’을 불하받는 과정에서도 고이즈미의 힘이 크게 작용했다고 한다. 또한 그녀의 죽음을 불러온 마지막 비행은 사실 만주국 승인을 기념하는 ‘일만친선 황군위문 일만연락비행’, 즉 친일 행각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 영화 <청연> 이미지     © 임진미 편집기자

 

그러나 이 논란을 통해 박경원은 ‘최초의 민간인 여성 비행사’란 이름 하나는 널리 알렸다. 박경원보다 앞서 비행기를 탔던 ‘최초의 여성 비행사’이자 독립을 위해 목숨까지 내놨던 독립운동가 권기옥은 아는 이도 별로 없고 이제는 그 이름조차 희미해져가고 있다. 

 

권기옥에 대한 자료는 거의 남아있는 것이 없고 역사적 평가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물론 국가보훈처에서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고 2003년 8월 권기옥을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긴 했지만 그것뿐이었다. 남자들의 성역인 항공 분야에서 고군분투하며 독립운동을 펼쳤던 신여성 권기옥을 기억하는 이는 극히 드물다. 영화 <청연>으로 인해 박경원이 ‘최초의 여성 비행사’라고 알려지는 바람에 권기옥의 존재는 더욱 희미해졌다. 독립운동가이자 최초의 여성 비행사, 이것만으로도 권기옥을 재조명해야 할 가치는 충분하다.

 

조선 최초의 여류 비행사이자 대한민국 공군의 어머니로 불리게 된 권기옥. 여성의 한계를 뛰어넘고 조선의 독립을 위해 하늘을 날았던 독립운동가, 권기옥의 삶을 들여다본다. 

 

▲ 영화 <청연>의 모델 박경원. 최초로 한국 하늘을 난 안창남, 최초의 여성비행사 권기옥(왼쪽부터).     © 임진미 편집기자

 

다음은 권기옥 선생에 대한 독립언론 <뉴스타파>의 영상과 국가보훈처 공훈심사과 채순희 사무관의 공적내용이다.


숭의여학교에서 결성된 비밀결사대 송죽회 가입

© 임진미 편집기자


권기옥(權基玉, 1901.1.11~1988.4.19)선생은 1901년 1월 평안남도 평양부 상수구리에서 권돈각(權敦珏)과 장문명(張文明)의 4녀 1남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할아버지 때에는 상당히 부유한 편이었으나 놀기 좋아하던 아버지가 할아버지의 유산을 모두 날려 선생이 4살 되던 해에는 남의 집 문간방 신세를 질 정도로 가난하게 되었다. 11살 되던 해에 은단공장에 취직하여 집안 살림을 돕던 선생은 이듬해 12살의 나이로 장대현교회(章臺峴敎會)에서 운영하던 숭현(崇賢) 소학교에 입학하였다.

 

졸업 후 숭의여학교 3학년에 편입한 선생은 수학 교사 박현숙(朴賢淑)의 권고로 당시 숭의여학교에 결성된 비밀결사대 송죽회(松竹會)에 가입,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1919년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신홍식으로부터 만세운동에 관한 연락을 받은 박현숙의 지휘 아래 한선부(韓善富), 김순복(金順福), 차진희(車鎭姬), 최순덕(崔順德), 김명덕(金明德), 장성심(張聖心) 등과 함께 기숙사의 일본인 사감 호시코의 눈을 피해 태극기를 만드는 한편 애국가 가사도 등사하였다.

 
그리고 그것들을 대찰리(大察里)의 어느 집 장롱 속에 깊숙이 숨겨 두었다가 치마 속에 감추어 숭덕(崇德)학교 지하실로 운반하였다. 3월 1일 숭덕학교에 모인 사람들은 강규찬(姜奎燦) 목사의 개회선언에 이어 김선주(金善柱) 목사가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곽건응(郭權應) 목사가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교정을 뛰쳐나와 거리에서 만세운동을 펼쳤다. 3월 4일 교사 박현숙이 체포되고 학교 주변에 형사들이 깔린 가운데 선생은 한선부, 김순복 등 20여 명과 함께 거리로 뛰쳐나가 만세를 불렀다. 며칠 후 선생은 이 일로 길을 가다 형사에게 붙잡혀 평양경찰서에서 3주의 구류처분을 받고 유치장에 감금당하였다.

 

평양청년회 김재덕의 부탁을 들어주다가 체포

 
유치장에서 풀려난 선생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연락원인 임득삼(林得三), 김정직(金鼎稷), 김순일(金淳一), 김재덕(金在德) 등과 함께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고 임시정부 공채를 대량으로 판매하여 그 자금을 임시정부로 송금하는 등의 일에 투신하였다. 선생은 숭의여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였는데, 학생들은 자신들의 긴 머리를 잘라 판 돈을 가져오거나 어머니의 패물을 판 돈을 내놓기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평양청년회를 조직하여 활동하고 있던 김재덕(金在德)으로부터 평양 근교 30리 밖 과수원에 가서 권총을 찾아다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선생으로부터 그 일을 부탁 받은 선생의 동생 기복(基福)이 권총을 발목에 노끈으로 묶고 그 위에 대님을 맨 다음 자전거를 타고 가져왔고, 선생의 어머니가 김재덕에게 전하였다. 그런데 김재덕이 권총을 시험하다 오발하여 총소리를 내게 되었고 그로 인해 선생은 평양경찰서에 다시 구속되었는데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났다. 그러나 끈질기게 미행하는 형사에게 들켜 체포되었다.

 

혹독한 고문이 가해졌다. 유치장 천정에 거꾸로 매달려 물을 먹여 수십 번을 졸도하였다. 일본인 다나까(田中) 형사는 검찰에 송치되는 선생의 심문조서에 이 여자는 지독해서 도무지 말을 않는다. 검찰에서 단단히 다루기 바란다는 쪽지를 곁들여 보냈다. 검찰에서도 혐의사실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가 없어 집행유예 정도로 그칠 수 있었으나 다나까의 쪽지 때문에 징역 6월의 실형을 선고 받았다. 죄목은 제령위반(制令違反)이었는데, 제령이란 일본의 법률을 한국에 그대로 적용할 수 없다고 판단된 부분에 대하여 조선총독의 명령으로 대신할 수 있는 것이었다.

 

평양청년회 여자전도대 조직

 

6개월 형기를 보내고 출옥한 선생은 1920년 8월에 문일민(文一民), 장덕진(張德震) 등으로부터 평안남도 도청을 폭파할 것이니 도와 달라는 전갈을 받았다. 선생은 그들을 만나고 숭현소학교 수위의 도움으로 숭현소학교 지하실 석탄창고에 숨어 폭탄을 제조하였다. 며칠 후 평남 도청에서 폭발사고가 일어났는데 폭파범은 한 명도 잡히지 않았다. 한편 당시 평양 숭실학교에는 브람스 밴드를 연주하는 전도대가 있었는데, 선생은 이 전도대의 리더인 차광석(車光錫)의 조언을 듣고 한선부, 차순석, 차묘석 등을 구성원으로 평양청년회 여자전도대을 조직하였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애국동지들과의 연락을 위한 한 방법이라고 생각한 때문이었다.

 

첫 전도회를 장대현교회에서 열고 평안도 일대를 순회하자 경찰의 감시가 시작되었고, 선생은 전도대장이라는 직분 때문에 경찰에 연행되어 시말서를 쓰곤 하였다. 시간이 갈수록 경찰 감시가 심해지고, 재구속 영장이 발부되었음을 미리 알게 된 선생은 1920년 9월에 발동기 없는 목선을 타고 멸치잡이 배에 숨어 상해(上海)로 탈출하였다. 상해에 도착한 선생은 임시정부 의정원 손정도(孫貞道) 의장 집에 투숙하였다. 그리고 남경(南京)에서 80명의 한국 학생이 공부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김규식(金圭植)의 부인 김순애(金淳愛)의 소개장을 받아 미국인 선교사가 경영하는 홍도(弘道) 여자중학을 찾아갔다. 21살에 다시 시작한 학업은 처음에는 언어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으나 1923년에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기에 이르렀다.

 

임시정부 추천으로 중국의 항공학교 입학

 

졸업 후 선생은 독립전쟁을 위한 군관 양성을 추진하고 있던 임시정부의 추천을 받아 1923년 4월에 중국의 변방인 운남육군항공학교(雲南陸軍航空學敎)에 제1기생으로 입학하였다. 항공학교 입학은 선생의 소녀시절의 꿈이기도 하였다. 선생이 16세 되던 1917년 5월에 서울 여의도 비행장에서 미국의 곡예 비행사인 스미스(a. smith)가 처음으로 선보인 곡예비행은 한국인들에게 근대 과학에 대하여 눈뜨게 하였고, 청소년들에게는 창공에 대한 동경과 이상을 갖게 하였다. 선생도 당시 비행사가 되리라는 생각을 하였고, 항공학교에 입학한 이후에는 비행기 타는 공부를 하여 일본으로 폭탄을 안고 날아가리라는 각오를 하였다. 입학 동기로는 이영무(李英茂), 장지일(張志日), 이춘(李春) 등이 있었다.

 
운남육군항공학교에는 프랑스에서 구입한 20대의 비행기에 2명의 프랑스 교관이 초빙되어 학생들에게 맹훈련을 하였다. 선생은 인내를 갖고 열심히 조종술을 익혔고, 기초이론과 지상 실습교육을 끝낸 후 프랑스제 꼬드롱 쌍첩(雙葉) 훈련기를 처음 타보았다. 여류 조종사가 있다는 소문이 퍼지고, 그것이 한국 여학생이고 조국의 독립운동을 하다가 망명했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다. 일본 관헌은 한 한국인 청년을 매수하여 선생을 암살하도록 하였다. 이 사실을 안 선생은 이영무, 장지일 등과 함께 그 청년을 공동묘지로 유인하여 사살하였다. 그 후 일본 영사관측에서는 길거리 어디서든 선생을 만나면 사살하겠다고 통보하였다. 따라서 그 후 선생은 학교 안에서만 생활하였다.

 

한국 최초의 여류비행사로 복무

 

1925년 3월에 선생은 운남육군항공학교의 제1기 졸업생으로 학교를 마쳤다. 이후에는 임시정부의 소개로 풍옥상(馮玉祥) 휘하 공군에서 한국 최초의 여류비행사로서 복무하였다. 1926년 5월 21일 [동아일보]는 중국 군민군에서 복무하고 있던 선생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전하였다. 중국창공(中國蒼空)에 조선(朝鮮)의 붕익(鵬翼), 중국하늘을 뎡복하는 조선용사 그 중에서 꼿가튼 녀류용사도 잇서. 안창남(安昌男), 최용덕(崔用德), 여류비행가(女流飛行家) 권기옥(權基玉) 등 국민군(國民軍)에서 활약. 1927년 8월 28일자 [중외일보]도 선생과 안창남, 최용태, 권태용 등 조선인 비행가들이 중국혁명전선에서 활약하고 있다는 소식을 게재하였다.

 
선생은 1927년에 장개석(蔣介石) 총통이 북벌(北伐)을 할 때, 동로항공사령부(東路航空司令部)에 최용덕과 함께 참여하는 등 10여 년 동안 중국 공군에서 복무하였다. 첫 출전에서 계급이 빨리 올라 소령, 중령에까지 올랐다가 공군을 개편할 때 대위가 되었다. 중국의 혁명공군 초창기에 공군을 선정하는 임무를 가졌으며, 기금을 모으고 선전을 위해 중국인 여자 혁명가 한 사람을 비행기에 태워 중국을 일주하기도 하였다. 선생은 총 7,000시간의 비행시간을 가지고 있는데 중국 군인 신분으로 그 군대의 훈련 과정으로 비행과정만을 마쳤기 때문에 비행사로서 자격을 인정받지는 못했다. 그러나 선생은 당시 한국인 최초의 여자비행사로 일컬어진다.

 

독립운동가 이상정과 결혼 후 함께 활동

 
1928년 5월에는 남경(南京)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28년 5월 25일자 [동아일보]와 [중외일보], 동년 6월 28일자 [동아일보]와 7월 3일자 [중외일보]에 의하면 선생은 손두환(孫斗煥)과 함께 남경에서 공산당 혐의로 체포되어 원적지로 호송될 뻔하였는데 중국인의 주선으로 상해 일본영사관에서 취조를 받은 후 풀려났다고 한다. 이 해에 선생은 이상정(李相定)과 결혼하였다. 선생과 이상정의 만남은 풍옥상 휘하 군에서 같이 활동하면서부터였다. 일본에 유학하여 역사학을 전공하였던 이상정은 1926년부터 풍옥상(馮玉祥)의 서북국민부대(西北國民部隊)에서 준장급 참모로 활약하였으며, 장개석의 부대와 통합됨에 따라 국민정부(國民政府) 정규군 소장으로 항일전선에서 활동하였다. 또한 1932년에는 남창(南昌)항공협진회 위원으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국민정부의 피난 명령에 의하여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 관련자 등 약 90여 명과 함께 11월에 남경을 출발한 선생은 이듬해인 1938년 3월에 중경에 도착하였다. 이후 중경(重慶)에 있는 국민정부 육군참모학교의 교관으로 임명되어 영어, 일어와 함께 일본인 식별법, 일본인 성격 등에 대하여 가르쳤다. 조선민족혁명당의 기관지 [망원경]에는 선생 부부가 모종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곤명(昆明)으로 향하였다는 등의 기사가 게재되곤 하였다. 이는 국민정부 육군참모학교의 교관을 맡고 있었지만 동시에 이상정이 1936년에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었던 것에서 그 활동이 한국이 독립운동에 관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1939년 11월에 행해진 이초생(李初生)의 심문기록을 보면 선생은 임국영(林國英)이라는 가명을 가지고 있었다.

 

대한애국부인회 재조직 후 사교부장으로 활동

 

1943년에 선생은 중경 임시정부 직할로 김순애(金淳愛), 방순희(方順熙), 최선엽(崔善燁), 최애림(崔愛林), 최형록(崔亨祿) 등과 함께 한국애국부인회를 재조직하였다. 사교부장(社交部長) 등으로 활동한 선생은 한국여성들을 규합하여 독립운동 전열에 참가시키고 여성들의 독립사상 고취에 진력하였다.

 
광복을 맞이한 이후 1948년 8월에 귀국한 선생은 1950년부터 1955년까지 국방위원회 전문위원, 1957년부터 1972년까지 [한국 연감(年鑑)]발행인, 1966년부터 1975년까지 한중문화협회 부회장을 역임하였고, 재향군인회 명예회원, 부인회 고문도 맡았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8년에 대통령 표창을 하였고, 1977년에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서울 장충동 2가 191의 4의 낡은 목조건물 2층 마루방에서 여생을 보낸 선생은 1988년에 사망하여 국립묘지 애국지사묘역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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