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오래된 한글편지에 숨겨진 조선시대 한글 발전의 비밀

국가지정 문화재 보물로 인정된 ‘나신걸의 한글 편지’의 역사적 의미

강미정 | 기사입력 2023/03/15 [21:51]

가장 오래된 한글편지에 숨겨진 조선시대 한글 발전의 비밀

국가지정 문화재 보물로 인정된 ‘나신걸의 한글 편지’의 역사적 의미

강미정 | 입력 : 2023/03/15 [21:51]


지난 3월9일 국가지정 문화재 보물로 등재된 15세기 무렵의 한글 편지(두 장)가 화제다.


조선 초기 군관을 지낸 나신걸(羅臣傑)이 부인 신창맹 씨에게 보낸 편지로, 2011년 대전 유성구 부인 묘에서 발견되었다. 문화재청은 함경도에서 보낸 편지로 군관 근무 시기를 고려하여 1490년대에 쓴 것으로 추정했다.

멀리 타향에서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소소한 가정사를 챙긴 사연에 가슴이 뭉클해지고 한문 편지로는 도저히 담을 수 없는 편지 쓴 이의 섬세한 감정과 우리말의 다정다감한 표현이 살아 있어 더욱 감동을 준다.

나신걸은 1461년에 태어났으니, 세종이 1446년에 훈민정음을 반포한 지 15년 뒤 태어나 반포 78년 뒤인 1524년에 63세로 죽었다.

문화재청은 “이 편지가 1490년대에 쓰였음을 감안하면 1446년 훈민정음이 반포된 지 불과 45년이 지난 시점에서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지역과 하급관리에게까지 한글이 널리 보급되었음을 말해 준다.”라고 하였다. 이 말은 틀린 말은 아니지만, 훈민정음 보급 역사를 좀 더 짚어볼 필요가 있다.

세종은 반포 1년 뒤인 1447년에 이미 함길도(함경도) 과거시험에 훈민정음을 도입한다. 지금으로 보면 공무원 시험에 도입했으므로 하급 관리들에게는 꽤 일찍 보급되었음을 보여준다.

세종은 훈민정음 반포 전인 1443년 창제 직후에도 하급 관리들인 서리들을 가르쳐 빨리 보급하려는 시도를 한 바 있다. 하급 관리들이 행정 문서에 훈민정음을 사용하면 자연스럽게 훈민정음이 하층민까지 두루 퍼지는 효과가 있음을 안, 세종의 고도의 보급 전략이었다.

한글이 행정 문서에 쓰인다는 것은 한자 못지 않은 공식문자로서의 권위를 획득하는 것을 의미한다. 세종은 실제로 반포 직후에 공문서에 한글을 직접 사용하고 전문 관청(언문청)을 세우는 등 치열한 노력을 기울이다. 그런 염원을 담아 반포 후 2년 뒤인 1448년에는 <월인천강지곡>이라는 찬불가 노래 가사를 지으면서 한자보다 한글을 더 크게 쓰는 노력을 기울인다.

반포 후 1450년 54세로 운명하기까지 4년간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훈민정음 보급과 정착을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인 셈이다.

그 결과 세종의 훈민정음 반포 3년 뒤인 1449년에 하연 대감 집 벽에 한글(언문) 벽보가 나붙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실록 1449/10/5). 고위직 장관급 대감을 비판하는 한글 벽보를 붙였으니 아마도 최소 하급 관리나 그 이상은 되었을 것이다. 나신걸의 한글 편지는 세종의 이런 노력이 성공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세종의 이러한 노력에도 후대의 지배층은 조선시대 내내 훈민정음을 주류 문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세조가 한글 불경책 보급에 온힘을 기울이지만 행정 문서에까지 쓰는 노력은 기울이지 않았고, 성종은 시골에까지 한글 관련 책을 보급하려는 노력은 기울이지만 역시 주류 행정 문자로 시도하지는 않았다.

중국에 대한 사대가 정치의 핵심이었으니 사대의 상징인 한자보다 한글을 더 인정할 수는 없었을 것이고 출세와 경쟁의 도구가 한자, 한문이었으니 지배층조차 한글을 낮게 보는 시대가 이어졌다.

한자만이 조선시대 내내 주류 문자였고 한글은 내내 비주류 문자였다. 그나마 고종 임금이 1894년 내각에 한글을 주류문자로 선언하지만, 실제로는 조선이 끝날 때까지 주류 문자가 되지 못하고 일제 때는 아예 주권을 빼앗기고 광복을 맞이했다.

문화재청은 “특히 조선 시대 한글이 여성 중심의 글이었다고 인식된 것과 달리, 하급 무관 나신걸이 유려하고 막힘없이 쓴 것을 통해 남성들 역시 한글을 익숙하게 사용했음을 보여 준다. ”라고 했다.

이 역시 틀린 말이 아니었지만 올바른 판단은 아니다. 조선시대 때 한글을 만들고 보급한 것은 남성이었지만 보급과 발전 중심에 여성이 있었다. 남성 사대부든 하급 관리든 상대가 여성이었기 때문에 한글로 쓴 것이다. 곧 여성들이 한자, 한문에 절대적인 남성 관리들을 한글 사용으로 끌어들이는 역할을 했다. 한자 사대주의의 균을 내는 역할을 했다.

그럼에도 조선시대 18-19세기의 정약용, 박지원, 박제가와 같은 실학자들조차 한글 사용을 지식의 도구로 거부한 것은 지식 실용화를 거부한 셈이니 지식 실용화를 앞세운 제국주의 침략의 먹잇감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한글의 가치가 돋보이는 한류 시대, 인공 지능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한자 대신 영어가 사대주의를 대신하는 안타까움도 있다. 한글을 격찬하는 외국인들의 유튜브 동영상이 쏟아져도 정작 우리는 한글의 진가를 제대로 못 살리고 있다.

나신걸의 한글 편지가 문화재 보물이 되었으니 이제 우리는 한글을 인공지능 시대의 경제적인 실질적인 보물로 더욱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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