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통영시재향군인회 안보견학(경북 영덕군일원)

장사상륙작전전승기념관과 신돌석 장군 유적지 방문

김원창 | 기사입력 2024/11/12 [21:25]

2024년통영시재향군인회 안보견학(경북 영덕군일원)

장사상륙작전전승기념관과 신돌석 장군 유적지 방문

김원창 | 입력 : 2024/11/12 [21:25]

 

 
전국에 단풍이 짙어가는 늦가을에 통영시재향군인회가 2024년 안보견학으로 경북영덕군에 다녀왔다. 大게로 유명한 경북영덕군은 통영에서 꽤나 먼 거리에 있어 아침7시출발하여 첫번째 견학지인 장사상륙작전기념관에 11시에 도착 간간히 정성스레 준비한 간식으로 입도 호강했다.
 
또한 지루할 수 있는 거리이지만 동해안 7번국도를 따라 시원하게 쭉 뻩어 있는 동해바다를 보고나니 주중에 쌓여있던 스트레스와 함께 가슴이 뻥 뚫리는 듯 하여 지루한줄도 모르게 목적지에 온듯 했다.
 
전국에서 유일하게 바다위에 위치한 장사상륙작전기념관앞 바다는 장사해수욕장이고 장사상륙작전기념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피서철에는 가족단위 여행객이 엄청나게 붐빈다고 하는데 늦가을인 오늘도 캠핑야영객들도 보이고 바다주변에 사람들이 제법많았다 

장사상륙작전기념공원은 장사해수욕장 한편에 위치한 공원으로 장사상륙작전에서 희생된 장병들을 기리기 위한 추모공원으로 충혼탑도 있었다.
 
영덕군해설사님의 해설과 함께 충혼탑앞에서 묵념을 하고 영덕군의회 의장님, 부의장님의 환영인사말씀을 듣고 장사상륙작전기념관을관람하였다
 
장사상륙작전기념관 6.25전쟁당시 장사상륙작전에 투입되었던 군함인 문산호를 그대로 복원해 만든 기념관으로 과거 한국전쟁에 대한 아픔을 추모하며 상기할수 있는곳이다 기념관 내부는 총3층 규모로 꽤 넓었다.
 
장사상륙작전은 1950년 9월14일~19일까지 경북 영덕군 남정면 장사리에서 일어난 전투였다.
당시에 인천상륙작전 못지않게 낙동강동부전선에서 일어나는 위기를 극복하는 것도 중요하였다  하지만 병력이 모자랐고 급기야 정예부대가 아닌 어린 학도병 772명으로 구성된 독립유격대 제1대대를 장사리해안으로 상륙하는 작전을 세운것이다.
 
장사상륙작전은 1950년 9월14일~19일까지 경북 영덕군 남정면 장사리에서 일어난 전투였다.
당시에 인천상륙작전 못지않게 낙동강동부전선에서 일어나는 위기를 극복하는 것도 중요하였다  하지만 병력이 모자랐고 급기야 정예부대가 아닌 어린 학도병 772명으로 구성된 독립유격대 제1대대를 장사리해안으로 상륙하는 작전을 세운것이다.
 
1950년 9월14일 오후4시 유격대원을 태운 문산호를 부산항에서 출발시켜 15일새벽 장사리해안에 
도착하였지만  태풍이 몰고 온 심한 파도에 문산호는 좌초되고 만다 이때 장사리를 점령하고 있던 북한군의 빗발치듯 날아든 총탄에 맞선 10시간의 사투끝에 장사리상륙을 성공시켰다.

상륙한 유격대원들은 6일간 생사를 넘나드는 사투를 벌였고 상륙사흘만인 19일에 부상자110명을 포함한 640여명이 대기중인 조치원호를 타고 부산으로 돌아왔다 장사상륙작전은 성공했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국군 학도병139명이 전사하였다

결과적으로는 장사상륙작전은  북한군의 후방을 교란하여 보급로를 차단시켜 북한군 대부대를 유인하여 전선의 위기를 극복하였다 
국가가 위태로울 때 나이어린 학도들이 스스로 참전하여 살신성인의 희생정신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라고 한다.

ㅡ신돌석장군 유적지는 경북영덕군 축산면에 있다.신돌석장군은 평민의병장이며 이곳 유적지에는 장군의 생가,기념관을 비롯 의병대장 신공유허비와  신위와 영정을 모신 사당인 충의사가 있다.
우리가 도착한 시간이 12시 30분이었는데 해설사 점심시간이라서 자리에 없어 대신 영덕군의회 의장님이 성심을 다해 해설을 해 주셔서 너무 감사했고.
유적지  여기저기에 울긋불긋 단풍이 짙어가는 나무들의 모습도 너무 아름다웠다.
신돌석장군은 1878년 이곳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태호이고 어릴때 이름이 돌석이었다고 한다
수많은 전투를 전개하여 승리로 이끌어 일본군은 장군을 태백산호랑이 라고 하며 두려워했다고 한다
의장님 말씀이 신돌석장군은 축지법을 사용한건지 날라다녔다고 하셨는데 아마도 일본군과 싸우면서  이리저리 피하는 잽싸게 빠른 행동이 그리 보였던건 아닐까?
신돌석장군은 1908년 살해되어 30살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는데 청년시절 12년을 오로지 나라를 위해 의병항쟁에 몸을 바쳐 살다가신 진정한 애국자 의병장군이시다.
그당시 울진군에 전초기지를 건설하려는 일본군의 의도를 파악한 신돌석장군은 이를 막기위해 여러차례 울진공략에 나섰고 울진에 있는 일본인 거류민과 일본선박을 공격하고 당시 화폐를 담당하는 울진 우편취급소를 습격하여 의병활동에 필요한 군자금 마련도 했다고 한다.
대한제국 말기의 평민출신 의병장으로 을미사변과 을사조약 이후 경상도 강원도 일대에서 태백산호랑이라 불릴 정도로 용맹성을 떨쳐 일본군을 격멸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독립의병사에 길이남을 겨레의 명장이며 위인 이시다
경북 영덕군은 단순하게 대게로만 유명한줄 알았는데 지리적으로 전략기지로 중요한 곳이며 진정한 애국자가 많은 곳이었다는걸 이번 기회로 알게되어 소중한 견학이었다

 
6.25전쟁당시 장사상륙작전에 투입되었던 군함인 문산호를 그대로 복원해 만든 기념관으로 과거 한국전쟁에 대한 아픔을 추모하며 상기할수 있는곳이다.
 
기념관 내부는 총3층 규모로 꽤 넓었다.
장사상륙작전은 1950년 9월14일~19일까지 경북 영덕군 남정면 장사리에서 일어난 전투였다.
 
당시에 인천상륙작전 못지않게 낙동강동부전선에서 일어나는 위기를 극복하는 것도 중요하였다.  하지만 병력이 모자랐고 급기야 정예부대가 아닌 어린 학도병 772명으로 구성된 독립유격대 제1대대를 장사리해안으로 상륙하는 작전을 세운것이다.
 
1950년 9월14일 오후4시 유격대원을 태운 문산호를 부산항에서 출발시켜 15일새벽 장사리해안에 도착하였지만  태풍이 몰고 온 심한 파도에 문산호는 좌초되고 만다. 이때 장사리를 점령하고 있던 북한군의 빗발치듯 날아든 총탄에 맞선 10시간의 사투끝에 장사리 해변에 상륙을 성공시켰다.
 
상륙한 유격대원들은 6일간 생사를 넘나드는 사투를 벌였고 상륙사흘만인 19일에 부상자110명을 포함한 640여명이 대기중인 조치원호를 타고 부산으로 돌아왔다 장상상륙작전은 성공했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국군 학도병139명이 전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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